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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지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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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역사지도 시리즈 3

「우리역사지도Ⅲ」

핸드릭 하맬 13년 한국 발자취...... 1:760,000

제목: 핸드릭 하맬 13년 한국 발자취......

1653년 8월부터~1666년 9월 까지

ISBN 978-89-85433-67-9

초판 발행일: 2012년 5월

610×910mml코팅 낱장지도

10,000원l

저자: 채바다(전 바다박물관장)

동아지도: 발행

담당자: 032-224-7557    starmap7@hanmail.net

『우리역사지도 시리즈를 제작하고 있는 동아지도에서 제 1편 고조선의 광역과 요하문명, 제 2편 고조선 역사지도, 제 3편 우리역사지도(2), 제 4편으로 핸드릭 하맬 13년 한국 발자취를 내놓았다.

360년 전 핸드릭 하맬(Hendrick Hamel)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무역선 스페르웨르(Sperwer)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1653년 8월 16일 새벽 제주 남쪽 해안에 좌초하여 침몰하였다. 이 배에 64명 중 사고로 인하여 28명이나 되는 아까운 목숨들이 희생되었다. 이후 1666년 9월 여수 전라 좌수영에서 하멜을 포함해서 8명이 어선을 타고 야간을 이용해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이들의 행적을 문헌과 고지도 자료를 찾고 최신 GPS로 이들의 발자취를 답사하여 한 장의 지도에 옮겨서 한눈에 파악하도록 제작된 지도이다.

대항해 시대의 최고의 기술을 가진 그들의 지혜와 발자취를 더듬으며 이시대의 지표로 삼고자 이 지도를 만들었다. (地圖는 知圖이다.)』

1653년 8월부터~1666년 9월 까지 한국 발자취

■ 이 지도의 특징

1. 우리 민족 시대상을 한눈에 파악

1) 우리의 옛길 삼남 길을 찾아 GPS로 재조명하였다.

2) 조선시대 교통로를 한눈에 파악 할 수 있다.

3) 좌초부터 탈출까지의 경로를 지역별로 상세히 기록하였다.

4) 우리 문화의 활동 범위를 거시적 범공간적으로 볼 수 있다.

5) 우리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배양한다.

6) 우리 역사의 무대를 육지에서 대양으로라는 관점에서 본 지도이다.

2. 하맬의 기록과 해석

1) 역사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여러 해 동안 참고 문헌들을 통한 자료 분석과 10여 차례가 넘는 현장답사 끝에 올바른 해석을 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2) 하맬은 난파 지점에서 대정으로 이송하는 시간과 거리, 서울로 압송하는 과정에서의 거리, 지명들을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3. 난파 경위와

1) 대만 해협에서부터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15여일 스페르웨르호는 항해의 돛을 올려보지 못하고 계속 표류 하다가.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비바람으로 인한 방향 감각을 잃고 이었다. 이 순간 돌연 육지가 나타났다. 당번이 육지다 하고 소리 질렀을 때는 이미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좌초되고 말았다.

2) 육지에 상륙한 사람은 15명이었으며, 거의 모두가 알몸뚱이었고 난파선 속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또한 캄캄한 어둠 때문에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했고 구조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선원 64명 중 28명이 사망하고 생존자가 36명으로 확인되었다.

4. 지영록(知瀛錄)에 기록된 대야수의 위치는

1) 표착지에 관한 의문점들을 해결하는데 지영록에 나타난 표착지에 관해 기술한 대목을 여기에 옮겨 보면

西洋國漂人記時 牧使 李元鎭 判官 蘆錠 大靜縣監 權克中

癸巳(주:효종 4年 1653)7月24日 西洋國蠻人 핸드릭얌센 64名 同乘 一船 致敗于 大靜縣地方 遮歸鎭 下 大也水 沿邊 渰死者 26名 病死者 2名 生存子 36名 所着衣黑白赤三色相雜聚首相向或踞或立以書間之........中略.........

당시 목사는 이원진 판관 노정 대정현감은 권극중이었다.

계사(주:효종4년 1653) 7월 24일 서양국만인 핸드릭얌센 등 64명의 한 배에 함께 탔다가 대정현지방 차귀진 아래 대야수 근처에서 파선되었다.

익사자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 36명이었다. 옷 입은 것은 검정․흰색․빨강의 세 가지 색이 서로 섞였다........중략........

여기서 차귀진 아래 大也水는 어느 지점인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750년(영조26년)경에 제작한 전국 군현지도첩 해동지도 제7책 중에 수록된 제주도 지도편에는 이곳을 大也水浦로 명기하고 있다. 그 후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초간본에는 돈포(敦浦)로 그 명칭이 바뀌어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 필자 약력

채바다(蔡吉雄 필명: 채바다)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석사수료(사회복지학)

우리나라 최초의 원시배로 알려진 떼배를 복원하여 고대 일본문화의 뿌리와 문화이동 뱃길을 찾아 나선 고대해양탐험가. 시인

▒ 탐험이력

1차탐험: 제주 성산포ㅡ일본 오도열도(1996년5월)

2차탐험: 제주 성산포ㅡ일본 나가사키(1997년10월)

3차탐험: 전남영암대불항-일본 사가현 가라쓰(2001년4월) 왕인박사 도일 뱃길탐사

4차탐험: 제주도 해안일주(2003.10월) 남북민족평화축전 북한동포 환영 (남북평화호 명명)

▒ 시집

『파도가 바람인들 어쩌겠느냐』1994년

『저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 어머니 눈물은 아니시겠지요』1996년

『일본은 우리다』2001년

『그래도 그대는 행복하다』2002년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 수필집

『일출봉에 해뜨거든』

『성산포에서 띄우는 편지』2004년

▒ 연구논문

『한국 해양문화의 시원과 떼배의 역사적 고찰』

『하멜표류기의 역사적 재조명과 표착지에 관한 연구』

▒ 활동

전 바다박물관장

한국문인협회.한국시인협회

한국고대항해 탐험연구소 소장

-----하멜(Hendrick Hamel)표류기의-----

역사적 재조명과 표착지에 관한 연구보고서

연 구 보 고 자 : 채 바 다

1999 년 5 월 3 일

머 리 말

하멜(Hendrick Hamel)은 네덜란드 국적 동인도 회사 무역선 스페르웨르(Sperwer)호의 서기직을 맡고 있었다. 이 배는 대만 해협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도중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서기 1653년 8월 16일 새벽사이 제주 남쪽해안에 좌초하여 스페르웨르호는 산산조각 동강이 난 후 침몰하였다.

이 배에 승선하였던 사람들은 하멜을 포함해서 모두 64명이며, 이 사고로 인하여 28명이나 되는 아까운 목숨들이 희생되었다.

하멜 일행은 그 후 10개월 가량 제주에서 억류생활을 보낸 후 1654년 5월 그믐께 강진 해남을 거쳐 육로를 통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서울에서 2년여의 억류생활에 이어 1656년 3월에 전라도로 유배된 후 1663년 2월 여수 좌수영에 12명, 순천 5명, 남원 5명 세 곳으로 분리 이송되었다. 이들은 어려운 유배생활에 못 견뎌 1666년 9월 여수 좌수영에 유배된 일행 가운데 하멜을 포함해서 8명이 야간을 이용하여 미리 구입해 논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하멜은 그 동안의 한국에서 겪은 표류, 난파, 억류, 유배, 탈출 과정들을 네덜란드에 귀환하여 총독 요한 마짜이케르와 17인 평의회에 보고한 보고서를 책으로 출간하였다.

하멜은 이 보고서 형식이 표류기를 통하여 한국을 유럽서방에 최초로 소개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멜 일행이 표착 해안과 그 지형을 정확하게 찾아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추측과 추정들만 설왕설래하여 그 아쉬움이 컸다.

역사의 기록들과 본질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필자의 이번 연구 조사로 인하여 하멜 일행이 타고 온 스페르웨르호의 정확한 난파 표착지를 알아내고 그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그 희생자들과 후손들에게 위로와 위안의 기회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를 계기로 오랜 역사적 외교 관계에 있는 한국과 네덜란드 국가의 새로운 역사와 문화의 새 장이 열리는 전기가 마련되기를 희망하면서 이 연구 보고서를 쓰게 되었다.

1. 하멜의 기록과 해석

하멜이 쓴 표류기는 그가 네덜란드에 귀환하는 해인 1668년 출판을 시작으로 불어, 독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출판되어 세상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고전 중에 하나다.

그러나 원본에 대한 불실한 번역으로 인하여 그 해석들이 잘못된 부분이 더러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표착지에 관한 사항이다.

하멜은 정확한 표착지를 기록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를 잘못 해석되어 왔다. 그래서 하멜 표류기는 그가 겪은 운명처럼 역사의 다른 방향으로 표류하게 된 것이다.

스페르웨르호의 난파 해안과 그 지점을 찾아내는 일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과제라고 본다.

우리가 하멜 일행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이해와 정립은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맞이하는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더욱이 그 당시 실종된 선원들은 대부분 높은 파도에 떠밀려가서 실종하였지만 그 고혼들은 아직도 제주 바다 위를 떠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1996년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한․일 고대 떼배 탐험을 마쳤던 필자에게는 가슴이 저절로 메인다.

특히나 선장 에그베르쯔(Egbertz)를 위시해서 5-6명의 선원들이 난파된 인근 해안에 묻혀있지만 그 고혼들에 대한 발굴 조사도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는 것 또한 안타까운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여러해 동안 참고 문헌들을 통한 자료분석과 10여 차례가 넘는 현장답사 끝에 그 실마리를 찾게 됐다.

2. 난파경위와 상황

대만 해협에서부터 태풍을 만나 표류하기 시작하여 15여일 가깝게 스페르웨르호는 제대로 항해의 돛을 올려보지 못하고 계속 표류를 거듭하였다. 제주 해안에 접근할 당시는 스페르웨르호의 선수선미는 물론 배의 양쪽 측면으로 높은 파도가 덮쳐 선상 갑판 위에서도 선원들이 휩쓸려갈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바람으로 인한 방향 감각을 잃고 생과 사의 싸움은 초를 다툴 만큼 긴장감이 더욱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 순간 100m도 안 되는 해상에서 돌연 육지가 나타났다. 당번이 육지다 하고 소리질렀을 때는 이미 때는 늦었다.

닻을 황급히 내렸으나 제대로 박힐 리가 없었다. 그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좌초되고 말았다. 선상에 있던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이 덮치는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었고 선실에 있던 선원들은 미처 빠져나올 기회도 없이 스페르웨르호는 순식간에 난파되고 20여명이 넘는 선원들이 실종되고 말았다.

3. 사망자 발견 위치

난파 순간 하멜과 같이 육지에 상륙한 사람은 15명이었으며, 거의 모두가 알몸뚱이었고 심한 부상들을 입고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 앉아 난파선 속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고 하멜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캄캄한 어둠 때문에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했고 구조할 염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때, 선원 64명 중 28명이 사망하고 생존자가 36명으로 확인되었다.

선장 에그베르쯔가 이튿날 8월 16일 난파 지점에서 불과 10~12발(toifes) 거리에 위치한 모래 해안 위에 팔을 머리 밑에 받치고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곧 그를 인근에 매장하였다.

또한 5-6명의 시체가 여기저기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도 선장과 함께 가까운 주변에 매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4. 하멜의 활동과 선원들의 임무

하멜은 당시 22세의 젊은 청년으로써 스페르웨르호의 서기직을 맡을 정도로 그가 소속해 있는 동인도회사에서는 크게 인정받는 유능한 사원이었다.

하멜은 1651년 데포헤르 스트라이스호의 포수(砲手)로 활약하다가 그 실력이 인정되어 인디아에 내항(來航)후 전격적으로 서기직에 발탁될 정도로 판단력이 뛰어나고 책임감이 강한 청년으로 평가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표류기를 살펴 보느라면 놀랍도록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이국 땅에서 억류당하고 있으면서 난파당시에 긴박한 상황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감탄할 뿐이다.

더욱이 난파 지점에서 작은 소읍 대정으로 이송하는 시간과 거리, 서울로 압송하는 과정에서의 거리, 지명들을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멜은 전문적인 교육과 철저한 수련 과정을 마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요즘처럼 도로에 표시한 이정표들을 보고도 초행자로서는 거리 감각에 혼돈을 느낄 정도라고 생각하면 다시 한 번 하멜의 치밀한 거리계산에 고개가 숙여진다.

해상 생활에서 항해 일지는 매우 중요한 임무 수행 중에 하나다. 그 당시 항해 기록은 새로운 활동무대를 개척하기 위한 대탐험의 목적을 띄고 있을뿐더러 다음 항해자들을 위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정확성과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지는 아주 중요한 항해이다. 이들은 항해술은 물론 군사무기 다루는 법, 의학의료, 외교 통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다양한 전문성을 갖춘 고도의 두뇌 집단일뿐더러 풍부한 실전을 두루 거친 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스페르웨르호는 무역선 고유역할인 화물 운송의 성격을 훨씬 뛰어넘는 탐험, 물산(物産)수집은 물론 그 나라의 정치제도, 외교통상관계, 군사제도, 종교, 지리, 풍습 등 다양한 정보자료까지 수집․분석하여 보고서를 작성할 정도로 그 임무들을 다양하게 부여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5. 하멜의 지위와 월급 명세서

하멜의 월급과 그 외 선원들의 월급을 비교해 보면 하멜의 위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월급은 곧, 노동의 대가이며 그 사람의 책무와 직위에 따른 보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선원에 비하면 2배에서 8배 가까이 높은 월급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과 의사로 승선한 마튜스이보켄의 월급이 14길더에 반해 하멜은 배가 넘는 30길더를

받고 있다.

그 당시 하멜 일행이 받았던 월급 내역은 아래와 같다.

이 름, 출 신 지, 월 급, 직 책, 나 이

헨드릭하멜, 호르쿰시, 30길더, 서 기, 36세

호베르트데니스젠(父), 노틀담, -, 조타수, 47세

데니스호베르젠(子), 노틀담, 5길더, 급 사, 25세

마튜스이보겐, 에추이센, 14길더, 외과의사, 32세

얀피에터센, 프리줄란드人, 11길더, 포 수, 36세

헤르트얀센, 로텔담, 10길더, 선원(전 급사), 32세

코르넬리스디르크스, 암스텔담, 8길더, 선 원, 31세

베네딕투스클레르크, 로텔담, 5길더, 급 사, 27세

※ 하멜이 탈출 이후 한국에 잔류한 일행과 사망자 인적사항

이 름, 출 신 지, 직 위, 나 이, 잔류지명

요하네니스 람펜, 암스텔담, 조 수, 36세, 남원

헨드릭코르넬리스센, 브릴랜드, 갑판원, 37세, 남원

얀클라 센, 노르웨이, 요리사, 49세, 남원

야콥얀스, 프레켈렌, 조타수, 47세, 여수

안토닉 울데릭, 엠텐, 포 수, 32세, 여수

클레스 아렌첸, 오스트 보렌, 급 사, 27세, 여수

산데르트 바스켓, 스코트란드, 포 수, 41세, 순천

얀 얀스 스펠트, 우트레히트, 하급수부장, 35세, 순천

※ 압송 도중 사망자

플얀세콜 : 프프메렌드 출신[포수(砲手)], 압송도중 영암에서 사망(심한 부상 후유증으로)

※ 옥사(獄死)자 명단

헨드릭얀센 : 암스텔담 출신, 1등항해사

헨드릭얀센보스 : 하를렘 출신 , 포수

이들은 1655년 9월, 청나라 사신 행렬에 끼어들어 소란을 피운 죄로 수감 중 사망.

이로써 1656년 3월 전라도로 유배오고 나서 여러 가지 질병과 어려운 고통으로 11명이 사망하였다. 그 이후 1663년 3월까지 생존자는 22명만 남았다.

6. 표착지 접근방법과 지리적 위치

가. 소요시간과 거리

하멜은 1653년 8월 21일자 기록에서 출발 상황과 도착지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정오가 되자 우리 일행들이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알려주었다. 거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말을 태우고 부상이 심해서 말을 탈 수 없는 사람들은 들것에 태워졌다. 오후가 되자 기병과 보병들이 호위를 받아 그 곳을 출발하였다. 4리으(quatre lieue)를 가서 저녁에 대정이란 읍내에 이르렀다. 우리 이행은 식사를 한 후 숙박소 라기 보다는 마굿간 같은 창고로 안내를 했다.”.....중략......

여기서, 4리으(lieue)란 미터로 환산하면 16km에 달하는 거리다. 정상적인 사람들의 보통 걸음걸이 속도는 한시간에 약 4km를 걷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하멜 일행이 이 날 숙소까지 걸은 시간은 약 4시간 소요된 것으로 알 수 있다. 한 여름 뙤약볕에서 부상당한 일행들이 들것에 들려서 호송되는 행군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여기에다 중간휴식시간을 1~2시간으로 보아진다. 그 이유인즉, 일반적인 도보 행군이라 할지라도 1시간에 20분내지 30분은 통상 중간휴식을 취해오는 예에 비교하여 보았다.

필자는 일단 그 당시 숙소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길은 없으나 대정 현청 자리로 알려지고 있는 현재의 보성초등학교 가까운 주변만은 확실한 일이고 보면 그 거리의 오차는 1~2km내외일 것으로 판단된다.

결과적으로 이 날 하멜 일행이 대정현청이 있는 숙소까지 약 16km를 걸은 셈이며, 이 날 행보시간은 4시간내지 6시간 남짓 걸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하여 이동거리 조사 방향을 보성초등학교 정문을 출발 기점으로 잡고 하멜 일행이 호송되어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역순으로 12번 일반국도를 동서 두 방향으로 설정하였다.

그 이유인즉, 현재의 일반 국도는 옛길 위에 현재의 도로로 대부분 발달되어 왔기 때문에 조사 대상으로 선정하는 데는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고 판단되었다.

① 대정현청을 중심으로 난파사고 해안이 16km ±1km 내외의 거리에 위치하여야 한다. (이 거리는 하멜이 표류기록에서 밝혔듯이 4리으[16km]라는 거리에 근거를 두었으며 정 오가 조금 지나서 반나절을 걸어 저녁에 현청이 있는 숙소에 도착한 시간과 거리를 기준을 삼았다.)

② 난파해안이 인접한 가까운 위치에 모래사장이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

이유인즉 선장 에그베르쯔가 모래사장에서 팔로 머리를 베고 숨져 있었으며 인근해안에 선장을 묻혔기 때문이다.

③ 난파선 스페르웨르호가 폭풍으로 인한 심한 파도와 바위에 서너차례 부딪쳐서 순식간에 침몰할수 있는 암반구조가 발달된 해안선이어야 한다.

④ 난파선 가까운 해안에 표착 일행들이 마실 수 있는 식수원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살아남 기 위해서는 계절상 한 여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물은 소중한 생명수이기도 하다. 난파 해안에서 대정현청으로 호송되기 직전 6일동안 표착자들은 가장 중요한 물 걱정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반대로 설명하면 가까운 인근에 36명이 살아남을 수 있는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식수원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⑤ 남풍 또는 남동풍에 높은 파도와 센 조류가 발달하여 난파선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해안이어야 한다.

나. 지리적 특성

하멜 일행이 대정현청으로 호송되어 왔을 것으로 예상되는 도로는 12번 일반국도와 16번 일반국도로 나눌 수 있는데 현재의 보성초등학교 정문을 중심으로 그 방향을 동서로 구분하였다.

① 몇 차례 답사결과 1차적으로 12번 일반국도를 선택하였다. 그것은 12번 일반국도가 해안 선과 만나는 곳을 난파예상 해안선 거리측정에 접근할 수 있는 최단 거리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② 하멜이 표류기에 적고 있는 것처럼 4리으[16km]거리에 해당하는 해안선을 난파해안으로 보아야 한다. (대정현청 자리였던 보성초등학교를 중심으로)

③ 조사선정에 나타난 해안선

㉠ 동쪽 해안선 방향

○ 색달동 진모살(중문해수욕장) 해안선

㉡ 서쪽 해안선 방향

○ 신도2리 도원포구 해안

이상과 같은 지리적 여건과 해안선이 위치하여야만 하멜 표착지를 찾는 기본적인 접근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7. 사고해안의 특징

가. 중문 색달동 진모살 해녀의 집 앞(중문해수욕장 입구)과 대정읍 신도2리(도원포구) 남쪽 해안은 대정현청(현 보성초등학교)을 중심으로 거리 측정 결과 거의 비슷한 거리에 위치 하고 있다.

① 보성초등학교 정문(대정현청) <---> 중문 진모살해녀의 집 앞(중문해수욕장)...15.5km

② 보성초등학교 정문(대정현청) <---> 신도2리 남쪽해안(도원포구).........................14.5km

나. 선장 에그베르쯔의 사체 발견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

다. 난파선에 실려있던 각종 물건들이 파도에 밀려 바위나 모래사장에서 쉽게 수거 할 수 있다는 점.

라. 이 당시 강한 폭풍으로 인하여 불과 15분안에 3번씩 충돌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는 돌출 암 반이 발달되어 있고 부상당한 선원들이 상륙하여높은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는 안전한 갯바위가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마. 망가진 돛을 수거하여 해안에서 천막을 칠 수 있고 1․2천명에 달하는 보병과 기병들이 경비를 설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인접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그러나 이번 연구조사에서 분명한 것은 이들 동서 해안 두 곳 가운데서 한 곳으로 표착지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필자는 1차 연구조사에서는 중문 색달동 해녀의 집 앞 해안을 난파 지점으로 보고 있었으나 그 후 지영록을 접하여 이를 근거로 검토한 결과 지영록 기록이 상당한 부분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 이유인즉 지금까지 국내 문헌자료에서 가장 충실한 기록을 남겨야 할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탐라록(이원진 목사 당시 기록)이 정확한 난파위치 기록이 불충한 것에 비하면 이익태 목사의 지영록은 난파위치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8. 지영록(知瀛錄)에 나타난 하멜 표착지

필자는 이번 연구조사로 인하여 1차로 하멜 표류기 불역본과 영역본, 한역본, 일역본을 중심으로 한 난파해안을 찾는 방법과 2차로 지영록에서 나타난 大也水 연변을 중심으로 난파해안을 찾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번 1․2차 조사에서 나타난 두 해안은 대정현청을 중심으로 동서로 방향만 다를 뿐 그 공통점이 매우 유사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2차 조사에서 지영록에 나타난 大也水 연변(도원포구)을 하멜 표착지로 기록된 것은 하멜

표류지에 대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리라고 본다.

다음은 지영록에 나타난 기록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영록은 제주 목사로 있던 이익태(李益泰-1694년~1696년 재임)가 그의 순력 행적과 주변 일기 등을 포함해서 13항목에 달하는 중국선박들이 제주에 표류한 기록들을 한데 모아 저술한 책이다. 이 표류기록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하멜 표류기에 관한 西洋國標人記의 대목이다.

이 기록의 첫문에는 하멜 일행이 탔던 스페르웨르호의 난파 해안에 대한 표착 위치를 기록하고 있어서 앞으로의 표착지에 관한 의문점들을 해결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그러면 지영록에 나타난 표착지에 관해 기술한 대목을 여기에 옮겨보기로 한다.

西洋國漂人記時 牧使 李元鎭 判官 蘆錠 大靜縣監 權克中

癸巳(주:효종 4年 1653)7月24日 西洋國蠻人 핸드릭얌센 64名 同乘 一船 致敗于 大靜縣地方 遮歸鎭 下 大也水 沿邊 渰死者 26名 病死者 2名 生存子 36名 所着衣黑白赤三色相雜聚首相向或踞或立以書間之........中略.........

당시 목사는 이원진 판관 노정 대정현감은 권극중이었다.

계사(주:효종4년 1653) 7월 24일 서양국만인 핸드릭얌센 등 64명의 한 배에 함께 탔다가 대정현지방 차귀진 아래 대야수 근처에서 파선되었다.

익사자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 36명이었다. 옷 입은 것은 검정․흰색․빨강의 세 가지 색이 서로 섞였다........중략........

여기서 차귀진 아래 大也水는 어느 지점인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大也水의 지리적 유래와 역사적 배경

이 곳은 현재 한경면 고산리 한장동 마을과 대정읍 신도2리(도원포구) 해안과 인접하고 있는 곳으로써 마을 주민들은 이 곳을 대야물 또는 대물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또한 이곳 해안에 인접한 남쪽 위치에는 묵은 텟개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주민들은 도원포구가 만들어지기 이전까지만 하여도이 곳은 떼배를 이용한 어로 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1750년(영조26년)경에 제작한 전국 군현지도첩 해동지도 제7책 중에 수록된 제주도 지도편에는 이 곳을 大也水浦로 명기하고 있다. 그 후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초간본에는 돈포(敦浦)로 그 명칭이 바뀌어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표기된 지도는 다음과 같다.

新桃鄕史에 보면 1698년경 부락명을 된개(敦浦)라 명명하고 대정현 西面(그후 右面) 13洞에 속했다.

현 신도2리는 묵은 탯개에서 떼배를 이용하여 어로 생활을 하던 사람들과 삼각골과 멜케 등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2~3세대)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집단생활의 필요성을 느끼고 떼배에서 풍선 그리고 동력선으로 바뀌면서 현 신도2리 포구로 옮겨와서(일명 도원포구) 생활 터전으로 하여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이 마을 형성의 시초로서 그 유래가 되고 있으며 설촌 연대는 서기 175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 설촌 연대를 기점으로 이 곳을 논깍으로도 불리워오고 있다.

그 후 서기 1800년 전후하여 된개(敦浦)란 마을 이름을 서기 1811년 주민들의 합의에 따라 부락명을 도원으로 개명하였다.

특히 이 곳은 서기 1900년을 전후하여 마을 명칭으로 인한 주민들의 의견대립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서기 1914년 3월 府․郡․面이 통합될 때 大靜郡에서 大靜面으로 바뀌고 현재의 신도로 개칭되었다.

이상과 같이 大也水와 연계된 大也水浦의 유래와 지명에 따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았듯이 원래의 大也水浦는 묵은 텟개와 돈포의 원 이름임을 알 수 있다.

大也水浦는 지금으로서는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졌지만 현재의 도원포구(신도2리 포구)가 새로등장하면서 옛 역사의 흐름을 이어주고 있다고 하겠다.

제주도 일원의 옛 포구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한라산을 중심으로 흘러 내려오는 지하 용천수들이 해안에서 분출되는 곳에서 옛 포구들이 형성된 것처럼 大也水浦 인근에도 大也水 라는 물줄기가 해안으로 흘러내렸으나 지금은 해안도로의 개통으로 인하여 많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그 옛 모습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이와 같은 지명유래와 지리적 위치를 분석․조사한 결과 지영록에서 거명된 大也水 연변이라 한 곳은 현재의 도원포구를 중심으로 남쪽 해안에 위치한 모래사장 주변이라고 판단된다.

그 이유인즉 앞장에서 지적하였듯이 선장 에그베르쯔가 사체로 발견된 곳으로 추정되는 모래해안이 접속․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연구조사 과정에서 지영록이 발견된 것은 참으로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맺 는 말

1. 스페르웨르호가 난파된 표착지를 새롭게 찾는 일은 하멜이 한국을 서방 세계에 최초로 알린 역사적 사실들을 재조명함으로써 다가오는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맞이하여, 한국과 네 덜란드와의 전통적 오랜 역사의 바탕위에 그 우호관계가 크게 확산되어 발전할 수 있는 기 회가 한층 높아질것으로 본다.

2. 스페르웨르호의 난파로 인해 희생 당한 선장 에그베르쯔를 위시해서 28명의 고귀한 희생 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일은 그 후손들이나 네덜란드 국민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 는 계기가 마련되리라 본다.

3. 이러한 묻혀진 역사들을 재발견하는 작업을 통하여 한국인들이 세계인들에게 역사적․문화 적 인식과 가치관을 새롭게 심어주는 계기가 마련되리라 전망된다.

제 안

◆ 앞으로 추진되어야 할 목표와 방향

1. 희생자 추모비 건립과 표착 기념비 건립 재고

2. 추모 기념 행사 추진

3. 하멜의 출생지 호르큼시, 선장 에그베르쯔 출생지 암스텔담과 자매 결연 추진

(호르큼시는 하멜의 전남 강진군 병영에 유배되어 살던 인연으로 1998년 10월 자매결연 체결)

4. 하멜표류기에 따른 학술조사 및 국제 심포지움 개최.

※ 참고문헌

▷ 하멜표류기 핸드릭하멜 著 이병도 역 - 불역본․영역본(一潮閣) 1993年

▷ 핸드릭하멜 著 김창수 역 - 을유문화사 1989年

▷ 朝鮮齒囚記 핸드릭하멜 著 이꾸다시게루 역 - 日本 平凡社 1980年

▷ 조선왕조실록 탐라록 효종4년(35권 73上) - 제주문화방송 발행 김봉옥 편역 1986年

▷ 知瀛錄 이익태 著 김익수 역 - 제주문화원 1997年

▷ 新桃鄕史 - 신도리 신도초등학교 발행 1987年

▷ 제주마을 시리즈 12권 신도리 편 - 도서출판 반석 1991年

▷ 남제주군 古有地名 - 남제주군 199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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