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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삼국지-중원의 패자 조조 평전....정순태선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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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2010-06-11[15:41]  count : 1979  IP :
‘싸우면서 일하는’ 제도(屯田制)를 만들다
중원의 覇者(패자) 曹操(조조) 평전②/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던 好色(호색) 탓에 그는 화살을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鄭淳台         
  <屯田制(둔전제) 실시로 鄕村(향촌)을 再建>

 

  조조가 反동탁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 자금은 祖父 이래 축적된 家財(가재)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군자금이란 한 집안의 재산만으로 충당하기 어려운 규모의 돈이다. 조조가 동향의 淸流派 호족 衛玆(위자)로부터도 자금 원조를 받았다. 그럼에도 조조가 확보한 병력은 5000명에 불과했다.

  이때 起義(기의:의병을 일으킴))한 群雄은 각각 수만의 병력을 확보했다. 그들이 대부분 州의 장관인 牧(목=刺史)이나 郡의 장관인 太守였던 만큼 휘하의 官兵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제후연합군 속에서 병력이 적은 조조의 발언권도 작았다. 그의 速戰速決論(속전속결론)은 무시되었다.

  西進하던 反동탁연합군에 참가한 제후들은 동탁 軍의 精强(정강:정력이 있고 강함)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감히 先陣(선진)을 끊으려 하지 않았다. 조조는 단독 행동을 결심하고 洛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中途인 滎陽(형양)에서 동탁 휘하 徐榮의 大軍과 싸워 패전했다. 조조는 흐르는 화살에 맞았고, 그의 愛馬가 쓰러져 부하의 말을 얻어 타고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조조는 揚州(양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모병하여 4000의 병력을 새로 얻었다. 그러나 그 태반이 곧 반란을 일으켜 조조를 습격했다. 반란이 일어난 이유에 대한 기술은 없지만, 군자금․ 보급 부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년 4월, 동탁은 洛陽을 버리고 涵谷關(함곡관)을 넘어 그의 근거지와 가까운 長安으로 遷都(천도)했다. 연합군은 제 잇속만 챙겨 추격하지 않았다. 192년, 동탁이 그의 양자인 呂布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때 이미 反동탁 동맹군에 참가하고 있던 군웅들의 대부분은 再起한 黃巾軍(황건군)의 잔당에 대한 대응과 자기 지배영역의 확대를 위해 제각기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가 할거했다.

 

 

 

  이해 봄 4월, 지금의 山東省(산동성) 일대를 휩쓸던 黃巾 잔당이 兗州(연주)에 침입해 그들과 맞싸운 연주牧 劉岱(유대)가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조조가 영입되었다. 연주로 들어온 조조는 총세 100만 명을 號(호)하는 黃巾軍과 사생결단의 전투를 치렀다. 이때의 號曰(호왈) 100만은 으레 그렇듯이 中國類(중국류)의 과장일 터이다. 어떻든 黃巾軍은 병력도 많고 精悍(정한:날쌔고 용감함)했다. 그러나 기략에 뛰어난 조조는 끝내 黃巾軍을 齊北(제북‧현재의 산동성 齊南市) 부근으로 몰아넣어 항복시켰다. 항복 조건은 道敎(도교) 신앙의 허용이었다. 조조는 수락했다.

  그는 항복한 黃巾軍 중 정예병 30만 명을 선발했다고 한다. 이 숫자도 그 후 조조의 병력동원능력으로 미루어보아 10분의 1 정도로 할인해도 큰 차질은 없을 듯하다. 아무튼 이것이 조조 軍의 핵심으로서 그 후 靑州兵(청주병)이라고 불렸다. 청주병을 조직한 이후 조조 軍은 강군으로 일컬어졌지만, 화급한 문제는 어떻게 이들을 먹이냐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史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連年(연년·여러 해를 계속) 흉작 때문에 심각한 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각지에 봉기한 軍團은 모두 식량조달계획 같은 것이 없었고, 굶으면 약탈하고, 남으면 그냥 버렸다. 최후에는 뿔뿔이 흩어져 流民化했고, 싸우지 않고 자멸한 군단이 不知其數(부지기수)였다. 河北에 웅거한 원소의 군단조차 뽕나무의 열매로 연명했고, 長江․ 淮河(회하)의 곡창지대에 할거한 袁述(원술)의 군단도 부들(蒲)과 조개를 채취해 먹었다. 사람이 사람을 먹고, 鄕村(향촌)은 거칠어져 폐허와 마찬가지였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맨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조조였다. 그 實行 프로그램이 屯田制였다. 조조는 이렇게 강조했다.

  “국가를 安泰(안태)로 이끄는 데에는 軍의 강화와 식량의 충족이 제1이다. 秦(진)은 농업에 重點을 두어 천하를 통일했고, 漢의 武帝는 屯田策에 의해 西域(서역)을 평정했다. 이것이야말로 先例(선례)로 삼아야 할 일이다.”

  196년, 그는 근거지인 許(허: 지금의 하남省 許昌市) 주변에 난민을 모아 둔전제를 개시, 100만 斛(곡)의 수확을 올렸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그 후 각 州․ 郡에 田官(전관)을 설치, 식량을 비축했다. 5년 후에는 “곡식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들은 기쁘게 일했다”고 한다.

  본래 屯田이라 하면 변경에 배치된 군대가 평시 농경에 종사해 식량을 자급자족을 꾀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조조의 둔전제는, 그것을 內地의 황폐한 향촌을 재건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조조의 둔전제는 병사가 평시에 농경하는 軍屯(군둔)뿐만 아니라 難民(난민)을 定住시켜 농경에 종사하게 하는 民屯(민둔)까지 확대 시행된 것이었다. 天下大亂期여서 不在地主의 땅은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民屯에서는 屯田民과 官이 수확물의 50%씩 나눠가졌다. 당시 대부분의 난민들은 가진 것이 없었다. 황폐한 농경지에는 깊게 풀뿌리가 뻗어 있어 수년간 深耕(심경)을 하지 않으면 수확을 기대하기 어려운 곳도 적지 않았다. 농구와 農牛를 빌린 농민은 수확물을 民 4대 官 6으로 나눠 가졌다.

  一見 고율의 징수로 보이지만, 실은 백성에 유리한 편이었다. 民屯에서는 豪族(호족)의 중간착취가 없었고, 群盜(군도)의 습격을 두려워할 일도 없었다. 그 결과. 오랜 유랑 끝에 드디어 자립한 자영농으로서 鄕村(향촌) 공동체 생활을 再建할 수 있었다. 이 民屯으로부터의 수익이 조조 진영의 재정적․ 군사적 기반을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民屯의 全面 시행으로 병력․ 경제 자원인 人口가 증가했고, 戰時에는 兵站線(병참선)도 짧아지게 되었다. 조조의 屯田制는 훗날 諸葛亮(제갈량)과 孫權(손권)도 일부 수용했다. 조조는 실로 ‘싸우면서 일하는 제도’를 창출한 선구자였다. 

 

  <能力 제일주의로 課題遂行型(과제수형형) 브레인 집단 形成> 

 

         조조라는 인물은, 부하의 과거 및 출신 계급을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특징이 있는 인간을 좋아했다. 조조의 막하에 모여든 브레인 집단에는 淸流派의 흐름을 잇는 사대부들로서 內政과 군사․ 외교를 담당한 文人관료 출신들이 많았다. 荀彧․(순욱) 荀攸․ 賈詡(가후)․ 程昱(정욱)․ 郭嘉(곽가)․ 種繇(종요) 등이 그들이다.

 

 

 

  조조의 ‘지혜주머니’라고 불린 순욱은 동탁의 난 후 귀향한 후 잠시 원소 진영에 참여했으나 원소의 무능함을 간파하고 조조 막하로 달려온 인물이다. 조조의 신뢰가 두터웠던 程昱은 조조의 徐州 원정 중에 본거지 兗州(연주)가 여포의 공격을 받자 순욱과 함께 본거지를 지모와 끈기로써 지켜낸 謀臣(모신:모사에 뛰어난 신하)이다. 조조의 인재 등용 방침은 능력제일주의였다. 그는 求賢令(구현령)을 내리며 이렇게 명했다.

  “不仁․ 不孝(불효)하더라도 治國․ 用兵의 재주가 있는 사람은 남김 없이 推擧(추거)하라”

 당시 청류파 중에는 俗世間을 초월하여 혼자 자기 몸만 맑게 가지려는 ‘隱逸(은일)의 士’가 많았다. 조조는 같은 淸流派라도 淸談(청담)만 일삼는 인간에겐 一顧(일고)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오로지 新질서 형성이라는 목적을 향해 현실과 맞붙는 ‘高才異質(고재이질)’을 갈구했다. 이른바 課題遂行型(과제수행형) 그룹을 형성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전혀 새로운 브레인 집단 형성이었다. 목표가 뚜렷한 조조 軍團은 그 어느 집단보다 强固(강고)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은 조조가 재능을 사랑하는 남자였음을 전하는 에피소드다. 조조가 원소와 中原의 패권을 다툴 때 원소의 참모 陳林(진림)은 조조의 3代를 격렬하게 비방하는 격문을 써서 천하에 날렸다. 진림은 조조 등과 더불어 建安七子(後漢 말의 名文家)의 1인이었다. “조조는 贅閹(체엄)의 遺醜(유추)로서 懿德(의덕)이 없다”

  精液(정액)이 흐르지 않게 去勢하여 무가치한 인간(閹: 宦官인 조조의 祖父를 빚댐), 사마귀처럼 불필요한 존재(贅: 환관의 養子가 된 조조의 부친을 빚댐)이 남긴 더러운 종자(遺醜)인 조조에게 아름다운 德이 있을 리 없다는 뜻이다. 위의 짧은 귀절은 조조의 家門 콤플렉스와 용모 콤플렉스를 예리하게 찌른 것이었다. 官渡大戰(관도대전)에서 원소가 참패한 후 진림은 조조의 포로가 되었다. 조조에게 진림은 찢어 죽여야 할 사람이었다.

  조조는 “나를 욕한 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나의 父祖를 그렇게 비방한 것은 너무 심했지 않았느냐”고 진림을 추궁했다. 이에 진림은 “그때 나는 主君(원소)만을 섬겼을 뿐이오”라고 답했다. 조조는 “나를 저만큼 분노하게 한 것은 진림의 才筆(재필) 때문이 아닌가”라고 진림을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右筆(우필:문서작성 담당 참모)로 등용하여 그의 文才를 활용했다. 조조 밑에서 太尉(국방장관)을 지낸 賈詡(가후)도 원래 조조에게 애먹이던 張繡(장수)의 謀士로서 완성의 전투에서 조조를 위기로 몰았던 인물이다.

  조조 진영의 무장 중에서도 敵 진영에서 넘어온 사람이 많다. 우선 조조 막하 다섯 大將 중에서 세 사람이 그러했다. 張遼(장요)는 呂布의 部將이었고, 張郃(장합)은 원소의 부장이었으며, 徐晃(서황)은 楊奉의 부장이었다. 

 

         <獻帝 奉戴로 천하의 諸侯(제후)에 호령> 


  군사적으로는 黃巾 잔당인 靑州兵이, 경제적으로는 屯田制가 조조 진영의 최대 강점이었다고 한다면 정치적으로는 獻帝(헌제)의 奉戴(봉대·받들어 모심)야말로 조조가 군웅들을 호령할 수 있는 大義名分이었다. 獻帝는 董卓에게 좌지우지되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더욱이 동탁이 여포에 의해 피살된 후 동탁의 잔당들은 長安을 점거하고 동탁 집권 때보다 더욱 심한 학정을 일삼았다.

 

 

 

  당시, 河北의 군벌 원소는 황족 劉虞(유우)를 황제로 옹립하여 했지만, 조조는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獻帝를 간신의 손아귀로부터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소의 異母弟인 원술은 후일 스스로 황제를 僭稱(참칭)했다. 193년, 徐州에서는 闕宣(궐선)이라는 사람이 天子를 자칭했고, 徐州 자사 陶謙(도겸)의 지지를 받았지만, 조조는 그를 격멸했다.

  이 무렵 연주자사가 되었던 조조에게 참모 毛玠(모개)가 “천자를 받든 다음에 臣從하지 않는 자에게 호령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조조는 동의했다. 大義名分을 세운 正義의 軍은 당연히 士氣도 높아진다.

  3년 후인 196년, 조조는 본거지인 許로 헌제를 맞아들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휘하의 여러 장수들은 반대했다. 조조를 황제로 추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참모인 荀彧(순욱)․ 程昱(정욱)만은 적극 찬성했다. 순욱의 논거는 “皇上(황상)을 받들어 백성의 여망에 따르는 것이 大順”이라는 것이었다.

  조조의 라이벌인 원소에게 참모 沮授(저수)도 천자를 영입하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원소는 머뭇거리다 조조에게 선수를 당했던 것이다. 조조가 獻帝를 許로 영입한 이듬해(197년) 袁術은 壽春(수춘)에서 스스로 천자를 칭했지만, 결국 누구도 따르지 않는 가운데 양식이 떨어져 自滅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조조의 好色은 그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기도 했다. 建安 2년(197년) 봄 정월, 조조가 南征을 하자 宛城(지금의 河南省 南陽市)에 웅거하고 있던 張綏(장수)가 대항도 하지 않고 투항했다. 완성에 入城한 조조는 張綏의 숙모(張濟의 미망인)를 강제로 첩으로 삼아 張綏에게 짙은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 이에 장수는 돌연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미처 방어를 할 틈을 주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때 조조가 후계자로 세우려 했던 장남 曹昻(조앙)과 친위대장 典韋(전위), 그리고 조카 曹安民이 모두 전투 중에 전사했다. 조조 자신도 화살을 맞아 하마터면 비명에 죽을 뻔했다.

  그 해 겨울 11월, 조조가 재차 공격하자 장수는 穰城(양성: 지금의 하남성 鄧縣)까지 도망쳤다. 張綏는 荊州자사 유표와 동맹을 맺었고, 유표는 또 원소와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張綏를 완전히 제압해 놓지 않으면 장차 원소와 결전 때 배후를 찔릴 우려가 있었다.

  198년 조조는 세 번째로 남하하여 穰城(양성)을 공격했는데, 전세가 불리했다. 이때 유표가 장수를 돕기 위해 출병하자 조조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조조는 추격해오는 장수를 伏兵작전으로 痛打(통타)를 가했다. 그러나 장수는 모사 가후의 진언을 받아들여 재차 추격에 나서 이번에는 안심하고 철수하는 조조 軍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했다.

  그러면 일단 승세를 잡았던 조조가 왜 퇴각할 수밖에 없었을까? <삼국지> 武帝紀(무제기)의 裴松之 註(주)에서 인용한 <獻帝春秋(헌제춘추)>에 따르면 조조가 원소 진영의 동향에 대한 특급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정보의 내용은 田豊(전풍:원소의 모사)이 원소에게 ‘조조의 남정 중에 許都를 급습하여 헌제를 모셔오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소는 優柔不斷(우유부단)하여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장수는 모사 가후의 건의를 받아들여 두 번째로 조조에게 항복했다. 다음은 가후의 논리이다.

  “첫째, 조조는 천자를 받들어 천하를 호령하고 있어 정치상 우세를 점하고 있으므로, 조조에게 의탁하는 것이 명분상 정당합니다. 둘째, 원소는 세력이 강하고 조조는 약합니다. 우리의 人馬가 원소에게는 보잘 것 없지만, 조조에게는 눈발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숯불을 보내 주는 격이 되므로, 틀림없이 귀한 대접을 받으니 유리합니다. 셋째, 우리와 조조 사이에 원한이 있다고 하셨지만, 천하를 제패하려는 뜻을 가진 자는 쩨쩨하게 개인적인 은혜나 원한을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가후의 예상은 적중했다. 장수가 이르자, 조조는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곧바로 陽武將軍(양무장군)에 임명하고 제후로 봉했다. 가후가 조조의 군사로서 중용되었음은 앞에서 거론했다.

  이해 11월, 조조는 劉備(유비)의 요청을 받고, 徐州로 출동했다. 당시 유비는 자신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여포에게 虛를 찔려 徐州자사의 지위를 빼앗기고 있었다. 조조는 유비와 함께 여포 軍에 水攻을 가해 여포를 사로잡아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200년 봄 1월, 조조는 유비의 근거지 徐州를 직접 공격했다. 獻帝의 측근들이 조조 암살 계획을 추진하면서 유비를 가담시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평소 후하게 대접했던 유비의 배신에 조조는 격노했다. 유비는 패해 河北의 冀州(기주)에 있던 원소의 진영으로 도주했다. 이때 유비 막하의 關羽(관우)는 조조 진영에 투항했다. 中原의 패권을 놓고 조조와 원소가 雌雄(자웅)을 결했던 白馬․ 官渡(관도)의 싸움은 바로 다음 달에 개시되었다. <계속>

 

 
[ 2010-01-06, 1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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