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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武威(무위)의 歷史人物 ‘넘버 원’에 오르다 ..정순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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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날짜   2010-06-27[19:11]  count : 1140  IP :


武威(무위)의 歷史人物 ‘넘버 원’에 오르다
韓國人 최초의 현장답사-新羅金氏의 始祖 김일제의 고향(3)/“副재상급 고관인 莽何羅(망하라)의 모반을 제압하다”
鄭淳台 작가   
 

 

“폐하는 오랑캐의 자식 하나를 어찌 이다지도 중용하십니까!”

 

우리 일행은‘로마村’을 둘러보고, 河西走廊의 맨 동쪽 오아시스 도시이며, 흉노 휴도왕의 본거지였던 武威市(무위시)에 진입했다. 蘭州(난주)대학출판사에서 발간된 <西部 明珠―凉州>에 따르면 隋나라 때 凉州(양주)는 인구 2만여 戶(호)에 달했던 重鎭이었다. 隋(수)·唐(당) 시기 武威의 이름이 바로 凉州다.

 

중심가의 로터리에는 무위市 雷臺(뇌대)에서 발굴된 銅奔馬(동분마)를 크게 확대한 造型(조형)이 세워져 있다. 이 銅분마는 중국관광의 심벌 마크가 되어 있는데, 중국인들은 銅분마의 모습을 馬踏飛燕(마답비연)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한다. 달리는 天馬(천마)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하늘을 나는 제비의 등을 밟고 달리는 모습이다. 慶州 대릉원의 天馬冢(천마총)에서 발굴된 말다래에도 天馬가 그려져 있다. 두 말의 달리는 모습은 비슷하다. 다만 경주의 天馬는 구름을 밟으며 달리고 있다.

 

<<사진-武威市 상징인 천마像>>

 

우리 일행은 하서주랑의 제1번 오아시스의 낭만을 즐겼다. 시장 안 노천식당에 들러 양고기에 白酒(백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서점에 들러 <武威歷史人物>(무위역대인물) 등의 책도 구입했다. 우리 일행은 이름도 그럴 듯한 天馬호텔에 들어 실로 사흘 만에 샤워를 하면서 그동안 쌓인 노독을 풀었다. <무위역사인물>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인물이 신라김씨의 始祖(시조)인‘金日磾’(김일제)이다. <史記>와 <漢書> 등을 인용한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武威市 재래시장>>

 

<휴도왕의 태자인 日磾(일제)는 14세, 아버지의 피살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그는 모친 閼氏(알씨), 동생 侖(륜)과 함께 漢(한)에 투항했다. 일제는 養馬奴(양마노)로서 黃門(황문)에 배치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漢무제는 연회를 베풀고, 宮庭(궁정)에서 사육하는 말들을 사열했다. 일제 등 수십 인이 제각기 자신이 사육한 말을 끌고 殿閣(전각) 아래로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宮女(궁녀)들을 흘끔흘끔 훔쳐보았지만, 일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걸었다.

 

<<사진-武威市 중심가에 김일제의 약력이 새겨진 보판이 깔려있다. 김일제는 馬王爺(마왕야), 즉 馬神(마신)이라고 적혀있다>>

 

일제는 8尺2寸(漢代의 1尺은 22.3cm이므로 183cm)의 키에 용모가 장엄했다. 그의 말은 살찌고 튼튼해 무제의 주목을 받았다. 일제의 인품과 재능을 간파한 무제는 즉각 그를 馬監(마감)으로 발탁했다. 이후 일제는 侍中, 駙馬都尉(부마도위), 光祿大夫(광록대부)로 빠르게 승진했다. 일제는 겸손·勤愼(근신:힘써 삼감)하여 무제의 신임을 받아 무제가 순시할 때마다 황제의 마차에 陪乘(배승)했고, 宮으로 돌아오면 좌우에서 侍衛(시위)했다. 그에게 수천 금이 하사되었다. 많은 貴戚(귀척)들이 그를 질시하여 “폐하는 오랑캐의 자식 하나를 어찌 이다지도 중용하십니까!”라고 말했지만, 무제는 여러 流言蜚語(유언비어)를 물리치고 일제를 더욱 아꼈다.

 

일제의 모친은 자식 교육에 열심이어서 무제는 이를 美德(미덕)으로 보고 자주 賞讚(상찬)했다. 그의 모친이 죽자 무제는 甘泉宮(감천궁)에 그녀의 화공에게 畵像(화상)을 그려 걸어두게 하고‘휴도왕 閼氏’라고 題(제)했다. 일제는 매일 모친의 畵像(화상)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절했다.

 

侍中僕射(시중복야:內朝의 副재상급 고관)인 莽何羅(망하라)가 모반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일제는 평소 그런 낌새를 채고 망하라의 행동을 주시했다. 무제가 林光宮(임광궁)에 행차했을 때 일제도 수행했다. 때마침 일제는 몸이 아파 이 行宮의 衛士室(위사실)에 누워 있었다.

 

莽何羅 형제 셋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그날 밤에 擧兵(거병)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무제가 아직 침상에서 잠자고 있을 때 망하라는 무제의 거처에 잠입했다. 마침 변소에 있던 일제는 품 속에 칼을 품고 침입하는 망하라를 발견했다. 급히 달려가 망하라를 덮친 후 “망하라 모반!”이라고 외쳤다. 무제가 놀라 침상에서 일어났다. 좌우의 시위가 모여들어 망하라와 그 일당을 제압·포박했다.

 

일제는 30여년간 宮에서 재직했다. 그에게 宮女가 하사되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무제가 중병에 걸린 후 요절한 곽거병의 동생 霍光(곽광)에게 어린 후계 황제의 後見役(후견역)을 부여하려 했지만, 곽광은“臣(신)은 일제보다 못합니다”라고 양보했다. 이에 일제는 “본래 외국인인 제가 그런 고위직을 맡는다면 흉노가 漢朝(한조)를 가볍게 볼 것입니다”라고 또한 사양했다.

 

무제는 BC 87년 장안 서쪽 80km에 있는 五柞宮(오작궁)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71세, 재위기간 54년이었다. 趙 첩여(첩여:后妃의 계급)가 낳은 8세의 弗陵(불릉)이 황제에 올랐다. 그가 昭帝(소제)이다. 무제는 임종 전에 奉車都尉(봉거도위) 곽광, 駙馬都尉(부마도위) 김일제, 太僕 上官桀(상관걸)에게 어린 소제를 보필하라고 유촉하고, 망하라를 토벌한 일제를 秺侯(투후)로 봉하라는 遺詔(유조)도 남겼다.

 

일제는 소제가 아직 연소하다며 작위를 사양했다. 소제 즉위 1년여 후에 일제가 중병에 걸렸다. 대장군 곽광은 소제에게 車騎將軍(거기장군) 김일제를 侯로 封(봉)하도록 건의했다. 일제는 병상에서 秺侯(투후)의 인수를 받았다. BC 86년, 일제는 4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茂陵(무릉:長安 서북부에 위치한 무제의 墓)에 陪葬(배장)되었다.

   

古지도에 기록된 休屠城과 休屠澤

 

현재의 武威市는 인구 187만 명, 면적 3만3250평방km이며, 1區(구)와 3縣(현)을 관할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中國歷史地圖集(중국역사지도집)> 제2책 중의 西漢(서한=前漢) 시기 凉州刺史部를 보면 지금의 武威市 산하 民勤縣 지역에는 休屠·休屠澤 등 휴도왕과 관련된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 일대가 흉노 휴도왕의 본거지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武威라는 명칭은 곽거병이 휴도왕의 본거지를 점령한 후 그의 武功(무공)을 찬양하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사진-古지도에 표시된 武威>>

 

4월14일 오전 8시, 우리 답사단은 지프를 타고 무위시로부터 石羊大河(석양대하)를 따라 북상하여 古지도에 표시된 休屠城(휴도성)를 찾아 나섰다. 100여리쯤 북상하여 갈매기 등 물새가 나는 紅厓山水庫(홍애산수고)에 이르렀다.

 

<<사진-휴도성 內의 밀밭과 옥수수밭>>

 

석양대하의 강물은 紅厓山水庫에 흘러들고 있다. 水庫(수고:물 창고)는 대형 저수지의 중국식 표현이다. 우리는 다시 100리쯤 북상하여 民勤縣 중심가에 이르러 점심을 해결했다. 민근에서 大西河(대서하)를 따라 30리 쯤 다시 북상하다가 샛길로 접어들어 20여분을 달려 四壩鎭 三岔村(사패진 삼차촌)에 이르렀다. 넓은 옥수수밭와 밀밭 곳곳에 土城의 폐허가 남아 있다.

 

<<사진-휴도성의 성벽>>

 

이곳 村老(촌로)들은 이 마을에 休屠王(휴도왕)·김일제에다 漢武帝(한무제)· 關羽(관우)까지 한 자리에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紅衛兵(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김일제를 馬王爺(마왕야), 즉 馬神(마신)으로 부른다고 한다.

 

<<사진-휴도성의 휴도목>

 

우리 답사단 다섯 명 가운데 셋이 김씨이다. 오지 여행가인 김석규(단장)·김세환·김정석 등 3金씨가 휴도성 폐허 앞에 술잔과 김치 등을 차려 놓고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조선족 통역도 金씨여서 큰절을 올린 사람은 4金으로 늘어났다. KIST의 이종호 박사도 “내 마누라도 金씨”라며 큰절 대열에 합류했다.

 

4金과 1李는 큰절을 올리고, 폐허 주위에 제사 술을 뿌린 후 祭床(제상)의 음식을 조금 떼내어 ‘고수레’라고 외치며 사방에 던졌다. 고수레는 필자의 집안에서도 성묘 때 관습적으로 거행하는 의식이다. 기록에 의하면 샤머니즘을 신봉한 흉노족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수레를 했다. 飮福(음복)할 때는 필자도 술 한 잔을 받았다.

 

우리 일행은 삼차촌에서 다시 내몽골로 연결되는 큰 길로 되돌아 나와 休屠澤(휴도택) 유허를 찾기 위해 다시 북상했다. 휴도택은 황사로 묻혀 古지도상에만 표시되어 있는 큰 호수이다. 지구의 사막화 현상은 심각하다. 이번 답사여행을 떠나기 직전, 언론에 중앙아시아의 큰 호수 중앙아시아 아랄海의 위성사진이 보도되었는데, 이것도 과거의 5분의 1 규모에 불과한 초승달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만나면 무섭다. 民勤縣(민근현) 일대에도 모래바람이 잠시 일어나 필자의 얼굴을 따갑게 후려쳤다. 민근현은 보딘자란 사막과 텡케르 사막 사이에 끼어 있어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머지않아 모래에 뒤덮힐 것으로 보였다. 石羊河에서 갈라진 大西河를 따라 다시 100여리 북상했지만, 사방이 모두 모래로 덮힌 땅이었다. 大東河 쪽으로 횡단하다가 상당한 규모의 못을 발견했지만, 休屠澤의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다.

古지도를 보면 휴도택 바로 남쪽에 武威가 위치했고, 지금 武威市의 도심 지역은 姑臧(고장)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는 사막화에 의해 武威의 중심부가 남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일제의 원래 姓은 흉노 선우家의 連題씨

 

이젠 匈奴單于國(흉노선우국) 내에서 휴도왕의 位相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흉노국가에는 單于(선우) 아래 左賢王(좌현왕)·右賢王(우현왕)·혼야왕·휴도왕 등 24王將(왕장)이 있다. 이들은 선우의 가문인 連題(연제)氏 중에서 보임된다. 24王將은 흉노의 좌․우익 영토에 각각‘分地’라고 일컫는 봉건적 軍管遊牧區(군관유목구)를 장악하고, 1만 기 내외의 兵을 지휘하여, 모두 ‘萬騎(만기)’라고 하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24王將 밑에는 제각기 千長· 百長·什長(시방) 등 單位부대 隊長이 있고, 기타의 將官·官屬(관속)도 배치되어 있다. 좌익의 12王將은 그들의 軍管遊牧區를 선우 직할지의 동방에 두고 있다. 즉, 上谷郡(상곡군:지금의 河北省 懷來縣) 以東의 몽골고원으로부터 熱河(지금의 하북성 承德市)에 걸친 영토를 分占(분점)했다. 또 우익의 12왕장은 선우 직할지의 서방, 즉 上郡(섬서성 綏德縣)북방의 몽골고원으로부터 東투르키스탄 동부에 이르는 영토를 관할했다.

 

이들 왕장들은 선우 近親者(근친자)로서 봉건제후와 비슷한 존재이지만, 그 功罪(공죄) 및 선우 교체에 따라 자주 전임되었다. 또 새 선우는 자신의 子弟(자제)들을 중요 지역 왕장에 배치하기 때문에 前代 선우의 子弟로서 왕장에 보임되었던 者일지라도 職任(직임)·영지를 그대로 보유한다든지, 혹은 자신의 子孫에게 상속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흉노의 왕장은 각각 선우에 直屬(직속)한 軍區사령관을 겸한 총독과 같은 존재였다.

 

한편 선우 직할지, 즉 중앙에는 骨都侯(골도후)란 大臣이 있다. 左·右 골도후에는 선우의 姻族(인족)인 異姓(이성) 씨족의 長이 보임된다. 그 직무는 선우를 보좌해서 행정을 담당한다. 그들의 임무는 재판·감찰·경찰·외교 등이며, 선우 계승문제에도 관여했다.

 

골도후는 선우에 직속하는 비서장관이었다. 그의 중요한 임무는 흉노 左·右翼地에 배치된 여러 왕장의 동정을 선우를 위해 감찰하는 것이고, 그 충성심이 의심될 때 선우는 골도후를 파견하여 그 왕장의 부대를 감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앙의 重職에 선우의 姻族인 異姓의 씨족장을 임명하고, 兵權(병권)을 가진 지방의 王將에는 오로지 선우의 近親(근친)인 연제씨만을 배치했다. 따라서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의 姓도 선우와 같은 連題(연제)씨였다.

 

흉노제국에는 渾耶王·휴도왕·稽且王(계차왕)·丁零王(정령왕)·烏桓王(오환왕)·呼揭王(호게왕) 등이 있는데, 그들은 同名의 부족 내지 종족이 連題씨에 의해 정복된다든지, 혹은 흉노에 歸附(귀부)한다든지 했던 집단의 首長이다. 예컨대 휴도왕․혼야왕은 흉노종인 休屠·渾耶(혼야)라고 하는 부족에 파견된 수장이고, 오환왕․정령왕은 각각 非흉노종인 오환족·정령족에 파견된 수장이다. 王으로서의 칭호 및 권능은 물론 선우에 의해 부여되었다.

 

이와 같은 모돈 선우 이후 흉노국가의 통치체제는 기마민족 諸族(제족)의 씨족적 내지는 종족적 사회구조, 생산관계 등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한 채 선우를 頂点(정점)으로 하는 지배관계로 조직된 것이다.

이제, 흉노국가의 경제사정을 살펴볼 차례이다. 그 민족적 생산양식은 물론 유목이지만, 실제로는 약탈·納貢(납공)·徵稅(징세)·교역에 의한 수익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그 많고 적음이 국가의 존립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흉노는 매년 漢나라에 침입하여 마음껏 약탈하고, 또 漢과의 화평 조건으로 다량의 비단· 곡물 등을 받아냈다. 또한 關市(관시)라고 하는 흉노·漢의 교역시장을 통해 중국산 물자를 입수하고, 오환·선비·정령 등 복속 종족으로부터 모피 등을 징세하고, 東투르키스탄(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로부터 노예·모직물·馬·낙타 등을 징발했다.

 

흉노는 이처럼 수탈한 人畜(인축)과 물자를 여러 곳에 轉賣(전매)함으로써 더욱 큰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흉노의 경제사정은 그 국가 자체의 통제력 및 군사력과 표리의 관계에 있었다. 흉노국가가 번성한 시기에는 그 수익이 막대했지만, 세력이 실추하면 제로(0)의 상태로까지 감소 흉노 국가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흉노의 전성시대는 모돈 선우와 老上(노상) 선우의 兩代였다. 두 선우의 황금시대에는 漢을 압박하여 국위를 내외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漢에 무제가 즉위한 이후에는 차츰 양국 간의 형세가 역전되어 갔다.(계속)

 

[ 2010-05-21, 09:51 ] 조회수 :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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