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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韓國人 최초의 현장답사-新羅金氏의 始祖 김일제의 고향(2)/ ...정순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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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날짜   2010-06-27[19:14]  count : 1812  IP :


흉노 渾耶王(혼야왕)의 본거지 언지산
韓國人 최초의 현장답사-新羅金氏의 始祖 김일제의 고향(2)/“산 하나를 넘어가니 큰 저수지가 나오고, 그 너머로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遊牧(유목)의 적지다”
鄭淳台 작가   
 

살벌·용맹한 흉노족의 모습

 

<<사진-언지산>>

 

이제는 匈奴(흉노)가 누구인지를 살펴야 할 것 같다. 흉노는 몽골 高原의 유목민족을 처음으로 통일해 아시아 최강의 大帝國(대제국)을 이룬 민족이다. 흉노제국을 건설한 冒頓(모돈)은 태자 시절에 아버지 頭曼(두만)을 사살하고 單于(선우)의 지위를 탈취했다. 이 殺父(살부)의 배경과 유목제국의 건설과정을 보면 살벌·용맹한 흉노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두만은 후처가 낳은 어린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고 감숙성 일대의 강국 月氏(월지)에 태자 모돈을 인질로 보내 놓고 느닷없이 공격을 가했다. 이건 자신의 太子 모돈을 월지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는 흉계였다. 그러나 모돈은 單騎(단기)로 월지를 탈출하여 흉노국으로 귀국했다.

 

그런 얼마 후, 모돈은 그의 아비 두만과 사냥을 함께 나갔다가 기회를 포착, 아버지를 향해 鳴鏑(명적)을 날렸다. 명적은 우는 소리를 내며 나는 전투 개시 신호용 화살이었다.

 

<<사진-흉노가 처음 만든 신호용 화살 鳴鏑과 단궁>>

 

명적이 날자 모돈의 부하들은 일제히 두만 선우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두만은 고슴도치의 모습으로 사망했다. 모돈은 평소 그가 명적을 날리면 그 목표물이 무엇이든 무조건 그 방향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쏘도록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애첩을 향해 명적을 쏘았는데, 그녀를 쏘지 못하고 머뭇거린 부하를 그 자리에서 참해 버렸다.

 

선우로 즉위한 모돈은 흉노에 대해 영토 할양을 요구하는 흥안령산맥 일대의 강국 東胡(동호)를 기습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동호를 철저하게 짓밟고 돌아온 모돈은 승세를 타고 기련산맥 일대에 웅거한 월지를 쳐서 그 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사용했다. 남쪽으로는 오르도스에서 유목하고 있던 樓煩(누번)과 白羊(백양) 등의 부족을 병합하고, 북쪽은 丁零(정령), 堅昆(견곤) 등의 諸族(제족)을 복속시키고, 全몽골 고원의 유목민족을 통일했다.

 

마침, 중국에서는 劉邦(유방)이 楚覇王(초패왕) 項羽와의 싸움에서 승리해 漢제국을 창건했다. 한창 의기충천하던 모돈과 유방, 두 영걸이 전장에서 만나 누가 더 센지를 겨루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漢고조 유방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平城(평성:지금의 산서성 大同)으로 북상했다. 이때 모돈 선우도 精兵(정병) 30만을 이끌고 南下하여 지금의 大同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한고조는 흉노군에 패전하여 바로 동쪽 白登山(백등산)으로 도피했다가 4面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포위가 계속된 지 7일째 漢고조는 모사 陳平(진평)의 奇策(기책)을 채택, 모돈의 后(후)인 閼氏(알씨)에게 密使(밀사)를 보내 두터운 뇌물을 바쳤다. 효과가 그대로 나타나 모돈은 포위를 풀고 회군했다.

 

중국의 史書에 의하면 陳平의 기책이란 閼氏의 질투심을 부추긴 것이었다. 즉, 밀사가 알씨에게 “선우가 승리를 거두어 漢의 궁궐을 점령하여 미녀들을 얻으면 閼氏에 대한 선우의 총애가 식어버리겠지오”라고 아뢰었다는 것이다. 이때 漢의 밀사는 美人圖(미인도)도 가져가 알씨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漢文 史書에 기록된 이런 일화는 흉노의 풍습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순수 유목기마민족인 흉노와 돌궐은 半목축·半농업 민족인 선비족·만주족 등과는 달리 농경지대에 대한 영토적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貢納(공납)과 약탈·交易(교역)이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長安으로 돌아온 高祖는 곧 모돈 선우에게 사신을 보내 막대한 歲幣(세폐)를 바치고 흉노와 정전협정을 맺었다(BC 198년). 또 회유책의 하나로 公主를 선우에게 시집을 보냈다.

 

당시의 패권국은 흉노선우국이었다. 高祖가 죽은 후 漢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呂태후도 모돈 선우에게 심한 性희롱을 당했다. 그때 모돈 선우가 呂태후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지할 곳 없는 나는 沼澤(소택:늪지대)에서 태어나고 牛馬의 땅에서 성장한 탓으로 자주 국경을 넘어 中華(중화)의 땅에서 노닐기를 원한다. 폐하(呂태후)도 홀몸, 나 또한 홀로 산다. 兩主(모돈과 여태후) 그리하여 스스로 즐거움이 없다. 원컨대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그대의 없는 곳을 채우려 하노라>

 

기련산맥 동쪽은 초원, 그 너머는 大사막

 

톨게이트를 통과해 酒泉(주천) 시가지에 진입한 직후 필자는 北京에서부터 통역으로 우리 일행과 동행한 조선족 金부장에게 “택시를 잡아 타고 앞장서라”고 요청했다. 이번에는 길을 헤매지 않고 대번에 곽거병의 酒泉(주천) 유적지로 직행할 수 있었다.

 

<<사진-곽거병의 酒泉 유적지>>

 

우리는 酒泉에서 南下하여 장액시로 돌아와 大佛寺와 木塔(목탑) 등 불교 유적도 살펴볼 수 있었다. 西夏 시대에 건립된 대불사의 臥佛(와불)은 入寂(입적)하는 석가모니를 표현한 것인데, 와불을 둘러싼 제자들의 모습, 특히 그 다양한 얼굴 표정들이 예술적으로 느껴졌다.

 

<<사진-장액 大佛寺의 누워있는 석가모니像>>

 

필자가 이번 답사를 마치고 귀국한 지 열흘 후의 사건이지만, 지난 4월26일 감숙성에서는 史上 최악의 황사가 발생하여 그 황사 때문에 3명이 죽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러나 지난 4월12일 하루 감숙성의 하서주랑은 무슨 동화의 세계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해발 4000~5000m의 준봉들이 이어지는 기련산맥은 간밤에 내린 눈에 뒤덮혀 온통 은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구름은 높은 봉우리를 넘을 수 없어 산허리에 걸려 있다. 하서주랑은 해발 3000m가 넘는 구간도 많다. 구름은 우리 발 밑에서 뭉개뭉개 피어났다. 일행 중 누군가가 “구름 위에서 노는 사람이 雲上人(운상인), 그렇다면 우리가 神仙(신선)이 아니냐”고 농담을 했다. 하늘은 잉크빛처럼 파랗고 투명했다. 기련산맥 동쪽은 초원, 그 너머는 大사막이다. 그 사이를 뚫고 하서주랑은 달린다. 이날 우리 일행은 장액-가욕관 간(260여km) 구간을 왕복했다.

 

BC 121년 봄, 곽거병은 隴西(농서:지금의 감숙성 남부 臨洮)에서 정예 기병을 이끌고 1000리 북상하여 焉支山(언지산)을 강타했다. 그는 흉노의 折蘭王(절란왕)·호후왕 등을 죽이고, 포로를 합쳐 참수 8960명의 전과를 올렸다. 이때 곽거병은 휴도왕의 祭天金人(제천금인)을 노획하여 유별나게 호기심 강한 武帝에게 바쳤다. 祭天金人은 흉노가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 모시는 金銅製 神人像(금동제 신인상)이다.

 

BC 121년, 이 한 해에 곽거병은 세 번이나 출정했다. 이 해 봄·여름의 원정은 이미 앞에서 거론했다. 세 번째 출정은 가을인 9월에 전개되었다. 이때의 출정은 다음과 같은 사연 때문이었다.

 

흉노의 伊稚斜(이치사) 선우는 혼야왕과 휴도왕이 거듭 패전하여 수만의 병력을 잃은 것에 격노하여 두 왕을 單于庭(선우정:선우의 주거용 텐트式 궁전이 있는 곳)으로 소환했다. 혼야왕과 휴도왕은 선우정으로 출두하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반드시 참수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혼야왕은 漢에 투항하자고 휴도왕을 설득한 뒤, 漢의 국경을 수비하는 장수에게 使者(사자)를 파견하여 투항 의사를 밝혔다. 급보를 받은 무제는 처음엔 흉노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이에 따라 혼야왕과 휴도왕의 병력을 접수하는 임무를 최정예 부대를 이끄는 곽거병에게 부여했다.

 

곽거병 軍이 혼야왕의 본거지로 접근하자 休屠王은 곧 항복을 후회했다. 이에 혼야왕은 휴도왕을 살해함으로써 휴도왕의 부하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때 곽거병은 흉노 진영에 뛰어들어 항복을 거부하는 흉노병 8000여 명을 베고 나머지 4만여 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무제는 長安으로 들어온 흉노 귀순자들에게 작위와 恩賞(은상:임금이 내리는 상)을 국가재정이 휘청거릴 만큼 베풀고 오르도스 지역에 배치하여 흉노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以夷制夷(이이제이)는 漢族(한족) 왕조의 常用 수법이었다.

 

<<사진-장액시 중심가에 세워진 마르코폴로像>>

 

4월12일 오전 8시30분, 우리 일행은 西夏 시대에 창건된 大佛寺(대불사)를 둘러본 뒤 장액 톨게이트를 빠져 G312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66km를 달리다가 山丹 톨게이트로 빠져나와 좁은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목표는 焉支山(언지산)이었다. 언지산은 흉노 渾耶王(혼야왕)의 본거지다.

 

山丹에서 강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곽거병이 점령했다는 霍城(곽성)에 이르게 되고, 왼쪽길로 접어들면 大馬營(대마영)이란 마을이 나온다. 山丹지역은 淸代까지 국가 직영의 대규모 말 목장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대마영에서 10여km 東進(동진)하여‘焉支山’이라는 간판이 붙은 산기슭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입장료를 내고 산 하나를 넘어가니 큰 저수지가 나오고, 그 너머로 넓은 초원도 펼쳐져 있다. 遊牧(유목)의 적지다. 그곳에서 다시 산길을 좀 올라가니 정상이 편평하고 사방을 경계하기 좋은 곳이다. 현재 중국의 道敎 사원이 들어서 있지만, 원래 渾耶王(혼야왕)의 본거지였다고 한다. 언지산을 답사한 다음 다시 30여km의 길을 되돌아 나와 山丹 톨게이트로 진입, 河西走廊(하서주랑)을 다시 달렸다.

 

<<사진-영창현 입구 로마인 석상>>

 

산단에서 100여리 달려‘로마村을 찾기 위해 永昌縣(영창현)에 들렀다. 영창현 중심가 로터리에 ‘로마人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로마村’어귀에서 만난 30대 청년은 큰 키에 코가 높고, 눈도 쑥 들어간 서양인 모습이다. 이 마을의 언덕에는 로마식의 개선문이 세워져 있지만, 그들의 조상이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그들 자신들도 정확히 모른다.‘로마村’에 로마인의 후예를 자처하는 주민이 약 300명이라고 한다. 동서간의 인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사례인 것 같다.

 

<<사진-로마촌의 로마인 후예들>>

 

[ 2010-05-20, 13:04 ] 조회수 :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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