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ID :
PW :
아이디 저장하기 ID SAVE

커뮤니티

- 공지사항
- 질문과답변
- 자유게시판
- 지도UCC
- 지도관련사진
- 포토갤러리
- 설문조사
- 가입인사
Tel : 032) 224-7557
starmap7@hanmail.net
  제목   윤여동설에 의한 우리 역사의 지명비정
  글쓴이
   운영자
  날짜   2010-06-07[17:59]  count : 2402  IP :
윤여동설에 의한 우리 역사의 지명비정



윤여동설 이해의 전제조건

윤여동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라는 공간을 절대 염두에 두지 말고 중국 사서들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현재 중국의 지리적 상황과 결부시켜 이해해야 한다.



1. 왕검성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피서산장이라고도 부른다)이다.

이곳을 왕검성으로 보는 이유는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이 있는데, 사기 권2 하본기의 주에는 태강지리지의 기록을 인용하여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자치통감에는 “조선을 평정하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네 군으로 만들었다.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으로서 우거가 도읍했던 곳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통전에는 “갈석산은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했으며, 진서(晉書)에도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 때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하고 있어 지금 만리장성이 시작되었고, 갈석산이 있는 진황도 일원 또는 산해관 부근을 낙랑군 수성현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 부근이 곧 낙랑군 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되었다는 왕검성 역시 한반도 평양이 아닌 진황도 부근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고, 후세 이 왕검성이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는 것이다.

왕검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리가 답사하고 온 선사 유적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환인, 환웅의 역사가 바로 그 부근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칠로도산(七老圖山)이란 일곱노인이 그림같이 노니는 산이라는 의미로서 환인 7대를 의미한다고 생각되고,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이란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어보려고 노력한 산이라는 의미로서 환웅설화가 산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런데 그 부근에 왕검조선 역사와 시기가 일치하는 하가점 유적지가 있고, 환웅역사와 일치하는 동산취 유적과 우하량 유적이 있고, 좀 떨어지기는 했으나 환인 역사와 일치하는 흥륭와 유적이 있으니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아마 적봉 부근을 찾아보면 환인 역사와 일치하는 새로운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인 것이다.



♣ 삼국유사에는 왕검조선의 첫 도읍을 아사달이라고도 하고, 평양성이라고도 했는데, 규원사화에는 왕검조선의 첫도읍을 우수하벌판에 정했다 했고, 다시 옮긴 도읍이 왕검성이요, 평양성이라 했으며, 마지막 단군 고열가가 권력을 잃고 들어간 곳이 당장경 아사달이라 했다. 따라서 아사달이 왕검조선의 첫 도읍인지 마지막 도읍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2. 태백산

태백산의 위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신라의 북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대륙신라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진황도시와 승덕시의 경계를 가르는 도산(都山 해발 1846m)을 태백산으로 비정할 수 있는데, 그곳의 서남쪽 화첨(華尖) 부근이 처음 왕검조선이 건국된 곳일 가능성이 많고, 이곳이 우수하 벌판 또는 아사달이 아닌가 싶다.

혹시 신라의 태백산과 고구려의 태백산이 다른 곳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고구려는 대흥안령 줄기인 칠로도산 중의 어느 산(대광정자산: 해발 2067m 또는 광두산 :해발 1729m)을 태백산이라 불렀을 수 있고, 신라에서는 가까운 도산을 태백산이라 불렀는데, 이 모두는 결국 대흥안령 산맥에서 뻗어 내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대흥안령 산맥을 불함산, 개마산, 태백산, 도태산 등으로 불렀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 태백산의 위치는 후대 발해의 건국지인 태백산 동북쪽 동모산을 찾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데, 발해의 건국지 동모산 즉 발해 중경현덕부는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영성현으로 비정된다.즉 우리가 답사 중 요나라 불탑이 세워져 있던 “요 중경유지” 그 곳이 바로 발해의 건국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3.기자조선

기자조선을 어느 곳에 배치해야 할지 하는 것은 우리 역사 해석에 있어 매우 민감한 부분인데, 중국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을 고죽국으로 보고 있다. 이는 사기 권 28 봉선서 제6의 주에 “괄지지에는 고죽 옛 성이 평주 노룡현 남쪽 십리에 있다고 했는데, 은나라 때의 고죽국이다” 라는 기록과 수서 권67 열전 제32 배구 전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입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지금의 노룡을 고죽국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노룡은 고구려 땅이었던 적이 없고, 원래는 가야 땅이었을 것인데 후대에는 대륙백제와 대륙신라의 접경지역에 해당했던 곳이다.

그리고 갈석산은 원래 두 군데가 있어 옛날 중국 사람들은 좌갈석과 우갈석으로 구분했는데, 지금 창려의 갈석산은 좌갈석에 해당되고 우갈석의 위치는 잃어버렸는데, 아마 관청수고 부근을 말할 것이다.

따라서 고죽국 역시 고조선의 서쪽 변경 지역으로서 주나라와의 국경에 해당하는 지금 북경 서북쪽 관청수고 부근에 위치했고, 원래 그곳에 노룡이라는 지명이 있었을 것이나 그 위치를 잃어버리고는 지금 진황도 창려의 갈석산 부근에 노룡이라는 지명을 이동시켜 후세 사람들은 지금의 노룡을 고죽국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따라서 백이,숙제의 전설도 그곳으로 이동하여 전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노룡에 가서 직접 보았듯이 백이,숙제의 유적은 후세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후세 누군가가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비석을 세워 놓은 것이고, 이제정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고죽국이 곧 기자에게 봉해졌던 곳이라고 했으니 실제 기자조선은 지금의 관청수고 부근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태행산맥 북쪽의 영산(靈山: 해발 2420m)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중국 사서들은 고조선의 준왕이 기자의 41대 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많고, 준왕은 치우천왕의 후손일 것이다.

그리고 탁록은 당시 동이와 중국세력 간의 국경부근이었을 것이므로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국운을 걸고 다투었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의 요하 동쪽 만을 차지하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최소한 지금의 북경 부근까지는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위만조선

기원전 195년에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하고 흉노로 망명해 가자 위만은 그와는 반대 방향인 동쪽으로 도망쳐 고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해 왔는데, 그는 아마 옛날 고조선이 연나라의 진개에게 나라 서쪽 2천여 리를 빼앗겼을 때 그 땅에 살던 조선 유민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하여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믿고 그를 박사로 임명하고 나라의 서쪽에 사방 1백리 땅의 영지를 주고 변방의 수비를 맡기게 되는데, 이것이 실수였다.

위만은 지금의 고북구 부근에서 살면서 연나라(산서성 부근),조나라(하북성 석가장 부근), 제나라(산동반도 부근)에서 조선으로 도망쳐 오는 유민들을 모아 힘이 강해지자 마음이 변하여 준왕의 왕검성을 쳐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위만조선이다.

따라서 위만은 준왕의 왕검성을 그대로 도읍으로 사용하게 되고,준왕은 왕검성(현 승덕시 열하행궁)을 빼앗기고, 지금의 천진 부근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남쪽인 지금의 천진,당산시,진황도시,낭방시,창주시,보정시,석가장시,형수시 일원을 차지하고 사방 4천여 리 땅을 한(마한, 진한, 변한)이라 하고 다시 한왕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위만조선의 강역은 북경 부근의 만리장성 이북 지역이었을 것이다.



5. 창해군

창해군은 중국 세력이 조선 땅에 설치했던 최초의 군현인데, 이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많다.

우리는 지금 창해군이 강원도 강릉 쯤에 설치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말이 되지 않는다.

후한서 예전에는 “원삭 원년(B.C.128)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구를 이끌고 요동군으로 내속해 왔으므로 (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한 무제는 예군 남려가 내속해 오자 팽오로 하여금 요동군에서부터 창해군까지 교통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소요되는 비용이 너무 많아 나라가 시끄러웠다고 한다. 만약 창해군이 한반도의 강원도에 있었고, 위만조선이 북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요동군이 요하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적국인 위만조선의 강역을 지나 교통로를 개척할 수 있었을까? 그라므로 말이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때의 창해군은 한반도의 강원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이 바로 예(濊)였다.

이때 예왕 남려와 위만조선의 우거왕 사이에 갈등이 있어 예왕 남려가 위만조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한나라의 요동군으로 내속해 오자 한 무제는 그 예국 땅을 창해군이라 명명하고 요동군인 지금의 북경 서북쪽 선화 부근으로부터 북경을 지나 삼하, 옥전, 풍윤, 노룡, 무령, 진황도, 산해관을 지나 예국(요녕성 흥성, 호로도, 건창 부근의 대릉하 남쪽지역)까지 교통로를 개척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남쪽에 적대적인 강력한 세력인 한(韓)이 있는 것만도 부담스러운데, 바로 턱 밑의 예국이 한(漢)나라의 군현이 된다면 나라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한나라와 예국과의 관계를 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급거 진번군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창해군의 교통로 개척을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무제는 기원전 126년에 창해군을 폐지하게 되고, 진번군과 진한, 변한이 위만조선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 창해군 사건이 위만조선이 멸망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6.한사군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 아니다 하면서 논란들이 많은데, 한사군은 한반도에 설치되었던 것이 아니다.

낙랑군은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그 부근으로서 지금의 승덕시와 진황도시 일원으로서 치소는 지금의 승덕시였고, 진번군은 당산시 일원으로서 치소는 지금의 풍윤쯤으로 비정되고, 임둔군은 승덕시 풍녕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치소는 지금의 풍녕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현토군은 옛 동옥저와 예국이었던 지금의 요녕성 노로아호산 동남쪽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요하 서쪽지역까지로 비정되는데, 치소는 동옥저였던 부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진번군을 마한이 탈환하게 되고, 임둔군을 졸본부여가 탈환하게 되자 두 군이 폐지되고,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시키고, 옛 현토군의 관할지였던 예와 동옥저를 낙랑에 붙여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낙랑동부도위(치소는 불내성이라 하는데 조양으로 비정된다)는 서기 30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하고,서기 37년에는 낙랑군(전한낙랑군이라 한다)마저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하게 되어 일시적으로 낙랑군이 소멸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7년 후인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를 쳐 옛 낙랑군의 일부인 살수 이남 땅을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후한낙랑군이라 한다)을 부활 시키는데,이 후한낙랑군이 서기 313년까지 존속하게 된다.



♣ 후한낙랑군의 위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살수란 한반도의 청천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경 북쪽 풍녕 부근에서 발원하여 고북구를 지나 밀운수고로 흘러드는 조하를 말하는 것이다.

7. 대방군

대방군의 위치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전라도 남원이라 했고, 지금 학자들은 황해도를 말하는 것이라 하는데 모두 틀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덕흥리 유주자사의 고분벽화에 나타나고 있는 13군 태수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주란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주자사를 지낸 사람의 고분 벽화에 범양군, 어양군, 연군, 상곡군, 대군, 광녕군, 북평군, 요서군, 창려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 대방군 등의 태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유주에 속해 있는 군들로 해석이 가능해 곧 이들이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낙랑군(후한 낙랑군)은 지금의 흥륭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어양군은 밀운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상곡군은 탁록부근, 연군은 북경 서남쪽 방산 부근, 범양군은 북경 서남쪽 탁주부근, 요동군은 관청수고 너머 선화부근, 여서군은 탁록부근, 현토군은 장가구시 장북 부근, 대군은 산서성 대현을 말하는 것이고, 나머지 군들도 모두 그 부근에 위치했던 군들이었다.

그렇다면 대방군 역시 북경 부근에 위치했던 한 군이었을 것이다.

대방군이란 후한의 환제와 영제 말기에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 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군, 현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흘러 들어가자 건안(A.D.196- 219)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만들었다“는 곳으로서 대방군은 한과 예의 접경지역에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은 지금의 천진이 도읍이었고,예는 지금의 만리장성 너머 요녕성 건창, 수중, 흥성, 호로도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 한 전에는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에 닿았고, 남쪽은 왜와 접했다. 땅이 사방 4천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이 지금의 천진에 도읍하고 있었으므로 그 북쪽은 지금의 북경 동쪽 평곡 부근이 되는 것이다. 즉 대방은 한반도 황해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8. 평양성

수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 6리이고 산의 굴곡을 따라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신당서 고구려 전에는 “고구려의 왕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인데, 장안성이라고도 부른다.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까지이다. 왕은 그 좌측에 궁궐을 지어 놓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 하북성 승덕시의 열하행궁에 대한 기록과 일치한다.

승덕의 열하행궁(피서산장)은 청나라 때 청나라 황제들이 무더운 북경의 더위를 피해 여름철에만 와서 집무를 보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아마 이때 원래의 왕검성, 평양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열하행궁은 중국 사람들이 성을 쌓는 형식과 같이 평지에 네모 반듯하게 쌓은 성이 아니라 산의 굴곡을 따라 쌓은 어마어마하게 큰 성이다. 내부 면적이 110만평쯤 된다고 하는데, 성안에 커다란 산도 있고, 호수도 있고, 궁궐도 있다.

옛 단군이나 고구려의 왕들이 살았다면 이 정도 성에서 살았을 것이다.



9. 삼국의 도읍들

고구려의 기본 강역은 하북성 승덕시, 장가구시, 요녕성 일원으로서 건국지 졸본은 지금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 부근으로 비정되고, 국내위나암(국내성)은 북경 북쪽 유리묘에서 가까운 탕하구 부근으로 비정되고, 환도성은 북경 서북쪽 창평, 평양성은 요동 동쪽 1천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고 있는 승덕시 열하행궁, 평양동황성은 압록강 북쪽 호태왕비가 서 있는 집안, 장안성은 북한 평양이다.

백제의 기본 강역은 하북성 당산시 일원으로서 건국지 위례성은 당산시 난하 중류 대흑정수고 동쪽이고, 한성(하남위례성)은 당산시 천서이며, 웅진은 당산시이고, 사비는 천진시 계현이다. 따라서 소정방은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북서쪽으로 항해하여 발해를 건넌 다음 지금의 두하 하류(웅진구이다)에서 군사들을 상륙시켜 그 서쪽의 기벌포에서 신라군과 합류하여 북쪽의 사비 즉 계현을 향해 진군했던 것이고, 수군은 지금의 계운하를 타고 올라가려 했던 것이다.

신라의 기본강역은 진황도시 북부로서 천년 도읍 금성은 우리가 갔다온 바로 진황도 부근이고, 가야의 기본 강역은 갈석산이 있는 창려 부근으로 비정된다.



♣ 삼국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낙랑의 위치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수서 신라전에는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부른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 신라 전에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구 당서 신라국 전에는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대해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인접했다. 동서 1천리, 남북 2천리이다. 성읍과 촌락이 있다. 왕이 사는 곳을 금성이라 하는데, 둘에가 7-8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남쪽에 가야가 있다고 했고,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다.

이는 백제가 전한 낙랑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기록이며, 곧 낙랑 땅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며, 갈석산 부근이 가야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는 곧 삼국사기가 한반도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대륙에 있었던 삼국의 기록이라는 말이 되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국사기 기록에 대하여 맞다 틀리다 하면서 논쟁을 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10. 역사의 강

우리 역사 강역을 비정함에 있어 중요한 곳은 강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 고대 역사에 언급되고 있는 강을 모두 한반도 부근 또는 한반도 내로 비정해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아주 잘못된 것이다.



요수

우리 고대 역사에서 언급되는 요수는 지금의 북경 서북쪽 양하를 말하는 것이다.

수경에는 요수에 대하여 “대요수는 요새 밖 백평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요새로 들어가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흘러 안시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또 원토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대요수란 지금의 북경 서북쪽 흥화 부근에서 동양하가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남양하와 합류하여 양하가 되어 관청수고로 흘러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고, 소요수는 하북성 장가구시 화피령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숭례, 장가구를 지나 양하와 합류하는 청수하를 말하는 것이다.



압록수(압록강)

압록수 역시 우리는 지금 한반도 북쪽의 압록강을 말하는 것으로 인식하나 잘못된 비정이다.

압록수란 지금의 북경 북쪽 백하를 말하는 것으로서 말갈국 백수의 물이 오리의 머리색과 비슷해 속명으로 압록수라고 불렀다는 강이다.

한원 번이부 고구려(翰苑 藩夷部 高[句]麗) 조를 보면,

後漢書曰 地理志曰 玄菟郡 西蓋馬縣 馬縣 馬訾水 (自)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行 二千一百里 應邵云 馬訾水 西入鹽澤 高[句]麗記云 馬訾水 高[句]麗 一名 淹水 今名 鴨淥水 其國相傳云 水漁出 東北靺鞨國 白水色 似鴨頭 故 俗名 鴨淥水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 西與一水合 卽 鹽難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入海 (후한서와 그 지리지에는 ‘현토군 서개마현 마현의 마자수는 서북쪽에서 염난수로 흘러 들어와 서남쪽으로 서안평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길이가 2천1백 리이다’ 라고 하였고,

응소(應邵)는 말하기를 ‘마자수는 서쪽에서 염택(鹽澤)으로 흘러 들어온다’고 하였다. 고(구)려기에도 ‘마자수(馬訾水)를 고구려에서는 일명 엄수(淹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이름은 압록수라고 하고, 물고기가 떠올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그 나라에 전해진다.

동북쪽 말갈국 백수(白水)의 물이 오리의 머리색깔과 비슷하므로 속명으로 압록수라고도 하는데, 요동에서 5백 리 떨어져있다. 국내성(國內城)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드는 또 한 강과 합하여 염난(鹽難)을 이룬다. 두 강이 합해져 서남쪽의 안평성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마자수, 엄수, 압록수가 같은 강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북경 북쪽에 백하(白河)가 있고, 그 강이 대마군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밀운수고로 들어가 조하와 합류한 후 이름을 조백하로 바꾸어 서남쪽으로 밀운, 순의를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데, 한원에서 말하는 압록수와 흐름이 일치한다.

지금의 백하가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찾아내지 못했던 압록강이었던 것이고, 지금까지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던 염택 또는 염난은 바로 지금의 밀운수고(密雲水庫)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륙의 호수를 소금과 관련 있는 염택, 염난이라 했던 것은 옛날에 천진 부근의 바닷가에서 생산된 소금이 강을 타고 올라와 그곳 밀운수고에서 소금시장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생각된다.



살수

살수(薩水)는 금산령장성 부근의 고북구(古北口)를 지나는 조하(潮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살수대첩은 지금의 고북구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고북구는 중국 세력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북구를 통과해야만 하는 협곡인데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달리 침공루트가 없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철수하면서 이곳에서 수십만의 군사를 죽여야 했다.



패수

패수(浿水)에 대하여 수경(水經)에는,

“浿水 出樂浪鏤方縣 東南 過於臨浿縣 東入於海(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강인데, 이는 지금 난하(灤河)의 흐름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로서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 찾지 못해 애만 태우던 요수, 압록수, 살수, 패수를 모두 찾은 것이다.



11. 대륙역사와 한반도 삼국 흔적과의 연계

고구려는 고국원왕 이전에 이미 한반도로 진출했던 것으로 보이고, 평원왕 때는 도읍을 북한 평양으로 옮기게 되어 흔적들을 남기기 시작했고,

백제의 경우는 한반도에서 4세기 중반 이후의 유물들이 출토된다.

이는 백제가 4세기 중반이후에 한반도로 진출했다는 의미이다.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했다”는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이 곧 비밀의 열쇠인데,백제 무광왕은 백제 12대 계왕의 태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3대 근초고왕이 왕위를 빼앗아가자 그와 20여 년에 걸친 왕위쟁탈전을 펼쳤으나 결국 패하고 한반도로 도망쳐 전북 익산 금마에 반도백제를 세웠고, 후일 반도백제 동성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중국 사서에 동성왕의 할아버지로서 백제의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고 있는 모도왕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반도백제의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무령왕 역시 반도백제 출신이 대륙으로 건너가 왕위에 오른 사람인데 대륙에서 죽은 후 한반도로 유골을 가져와 능을 조성한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무령왕은 자기가 어린 시절 뛰놀며 자란 아름다운 한반도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경우는 한반도로 진출한 시기가 명확하지 않은데, 한반도에서 신라 유물은 대체적으로 6세기 이후 또는 통일신라 때의 유물이 출토된다.

다만 유추해 본다면 신라의 눌지왕과 고구려의 장수왕은 형님 아우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는데, 이때 반도백제가 강성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때 고구려의 장수왕은 반도백제를 견제할 믿을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해 신라에게 한번도 경주 부근의 땅을 주고 반도백제를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신라가 한반도로 진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한반도에 신라왕의 능은 없으며, 지금 경주 부근의 신라 고분은 총독 쯤의 사람의 무덤일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경주 부근의 고분들을 발굴해 보았지만 무덤의 주인공이 신라왕이라는 지석이나 명문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다. 이때 삼국은 대륙의 땅과 함께 한반도의 땅도 함께 가지고 있게 된다.



11. 고려의 위치

고려는 대륙에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의 도읍은 난하 중류 반가구수고 부근의 관성이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던 승덕시 열하행궁을 서경이라 했고, 신라의 도읍 금성을 동경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반도 동북쪽에서 고려의 동북9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이고, 고려의 천리장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우리가 갔던 오한기 부근의 연장성, 또는 진장성이라 하는 성의 흔적이 아마 고려 천리장성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려의 동북 9성은 고려의 도읍 개경으로 비정되는 관성의 동북쪽에서 찾아야 하는데, 지금의 대흥안령 동남쪽 오란호특(울란하오터) 남쪽 부근에 흔적이 있고, 쌍성총관부의 흔적 역시 그 부근에 있다.

물론 이때 고려는 대륙의 땅과 함께 한반도의 땅도 함께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려사에 한반도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2. 조선의 위치

대륙에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다.

우리는 이를 지금까지 황해도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겼다고 해석했는데, 개성에서 고려의 왕릉이 확인된 예가 없다.

이는 개성 부근에 있다는 고려의 왕릉이 실제 고려 왕릉이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시대 왕릉은 거창하게 왕릉에, 비석에, 재실까지 지어 놓았는데 시기적으로 차이가 별로 없는 고려 왕릉에는 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하나 변변하게 세워진 것이 없이 조그마한 표지석 만 세워져 있다.

따라서 이 태조 때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 황해도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륙의 땅은 언제 잃어버렸을까?

이는 아마도 청 태종에게 빼앗겼을 것이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했을 때 대륙의 땅을 청나라에게 양도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중기까지도 우리는 대륙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그 후 철저하게 파괴되고 감추어져 우리는 대륙 우리의 옛 땅을 잃어버린 것이다.

곳곳에 고려라는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은 그곳이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도 정작 우리 자신이 그곳이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모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상이 우리 역사의 대강이다.

이는 한반도에 대한 고대 역사 기록이 없다는 말이다.

고조선의 지도를 그린다면 한반도는 공백으로 남겨 두어야 하고 중심 강역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속하게 되는데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안사장님께서 역사적 진실을 전하면서도 국민 정서에 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관리자님(webmaster)께서는 아직 인사말(서명)을 등록하지 않으셨습니다.
관리자님(webmaster)의 방명록 흔적남기기 더보기
[ 08/08] 방금 신청했습니다. 책 1부 꼭 보내주세요. 월요일에 예금주 손미자로 입금하겠습니다. 안유진
[ 07/15] 반갑습네다. 대한민국 5만 지도 2006년 출간 이후 수정증보 판 안나오는지요 ? 최신판으로 조속히.. 최영곤
[ 07/06] 대한민국 5만지도 심마니주몽마을 공동구매 보고 선주문 하였읍니다 공동구매 가격으로 구매할수있나요. .. 정대현
[ 06/10] 대한민국 5만지도 심마니주몽마을 공동구매 보고 왔는데 가격이 다르네요.공동구매 가격으로 구매할수있나.. 장영실
[ 05/18] 지도 세 장 구매하는데 택배비는 좀 빼주세요. 나의택
관리자님(webmaster)의 최근포스트 더보기
[ 12/24] 중부권발전계획도 11
[ 12/24] 재미있는 익산이야기(만화책 제작) 8
[ 12/24] 의성군 관내도 납품샘플 3
[ 12/24] 양천구 신정6동 관내도 납품 샘플 5
[ 12/24] 양천구 목5동 관내도 납품 샘플 4
관리자님(webmaster)의 최근댓글 더보기
[ 10/01] 반갑습니다 ^^ 즐거운 하루되세요 !
[ 05/24] 안녕하세요, 회원분들께 적립금및 할인 혜택을 드리..
[ 05/16] 독도 지도 무료 배포에 관한 자세한 사항이 공지되..
[ 05/16] 감사합니다 !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더 좋은 지도..
[ 05/16] http://211.202.2.66/~starmap/damap/home/donga_ma..

덧글 0 | 엮인글(트랙백) 0